파초의 빗소리
파초(芭蕉)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 배운 김동명의 시(詩) '파초'를 통해서였다. '조국을 언제 떠났노'로 시작되는 이 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구절은 '소낙비를 그리는 너는 정열의 여인'이었다. 상상력이 빈약했던 때라, 훌라 춤을 추는 하와이 여인을 떠올리며 이 시를 읽었다. 그때까지 내게 파초는 춤추는 이국(異國) 여성의 이미지였다. 실제 파초를 보기 전까지는 그랬다.
파초는 키가 3m까지 자라는 파초과(芭蕉科)의 여러해살이 풀이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었던 강희맹(姜希孟)은
"녹색 전갈 같은 줄기가 촛대처럼 솟아나고, 푸른 난새 같은 잎이 나와 꼬리를 뻗는다"고 했다. 남도의 절에서 우연히 본 파초는 이국적이기는 했지만, 부드러운 여성의 이미지는 아니었다. 파초의 넓은 잎과 굵은 줄기는 오히려 강한 남성의 이미지에 가까웠다.
이태준이 쓴 수필집 '무서록'의 '파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비 오는 날. 다른 화초들은 입을 다문 듯 우울할 때, 파초만은 은은히 빗방울을 퉁기어 주렴 안에 누웠으되 듣는 이의 마음에까지 비를 뿌리고도 남는다.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함, 파초를 가꾸는 이. 비를 기다림이 여기 있을 것이다." 이태준뿐만이 아니라 조선 시대 선비들도 뜰 한쪽에 파초를 심어두고 푸른 잎의 시원함과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즐겼다.
그들에게 파초는 시상(詩想)과 감흥을 주는 식물이었다.
남도의 어느 절에서 한여름 밤을 보낸 적이 있다. 그날 밤에 들었던 파초의 빗소리는 맑고 영롱하기만 했다. 어쩌면 투명한 유리잔에 물의 양을 달리하여 잔을 두드려 연주하는 소리와 비슷했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처럼 30도를 넘는 더위가 이어질 때면 파초 잎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김은경 한국전통조경학회 상임연구원 2016.07.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