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백년의 신화] [덕수궁서 지금 볼 수 있는 작품들] [下]

그는 고뇌를 새기고 또 새겼다, 손바닥만한 은빛 세상에

보드라운 종이도 아니요, 질긴 캔버스도 아니다. 살짝 건드려도 바스러질 듯한 담뱃갑 속 은박지다. 이 작은 은빛 세상에 이중섭은 고뇌를 새겼다. 헤어진 일본인 아내와 격렬히 입맞춤하고, 바닷가에서 아들과 발가벗고 게 잡던 시절을 그렸다.

전쟁통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북에 남기고 쫓기듯 남으로 피란 온 화가 이중섭. 물자 부족이라곤 몰랐던 평남 평원 대지주 가문 도련님이 하루아침에 무일푼 신세가 됐다. 친구 집에 얹혀 다니며 동가식 서가숙하는 처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그림 도구로 썼다. 예리한 그의 예술 감각이 포착해낸 재료가 담뱃갑 은박지였던 것이다.

은지화 ‘신문을 보는 사람들’  오늘은 또 무슨 일이 있을까. 심각한 표정의 사람들이 신문을 펼쳐 읽고 있다. 전쟁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에 있었던 1950년대 초반, 한반도를 둘러싼 그날그날의 뉴스에 민초(民草)들은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으리라. 담뱃갑 은박지에 새겨 그린 은지화 ‘신문을 보는 사람들’(1950년대 작, 가로 15㎝·세로 10.1㎝)은 주한 미국 대사관 재무관이었던 아서 맥타가트가 1955년 사서 이듬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한 작품이다. 드물게 제법 또렷하게 채색한 은지화다. 삼각형으로 접힌 선을 신문 돌리는 사람(오른쪽 위)의 팔 윤곽으로 사용하는 등 이중섭은 은박지의 접힌 자국마저도 구도에 활용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은박지 그림은 당시 동료 화가들에게도 신세계였다. "은종이에 송곳으로 선을 북북 그은 위에 암비 색깔을 대충 칠한 뒤 헝겊이라도 좋고, 휴지 뭉치라도 좋아라, 적당하게 종이를 닦아내면 송곳 자국의 선은 암비 색깔이 남고 여백은 광휘로운 금속성 은색 위에 이끼 낀 듯 은은한 세피아조(調)가 아롱지는 중섭 형의 그 유명한 담배 딱지 그림도 이 무렵에 이룩된 가장 창의적이요, 독보적인 마티에르(질감)인 것이다." 이중섭과 부산 피란 시절을 함께 보낸 동료 화가 박고석(1917~2002)이 훗날 회상한 얘기다.

그렇다고 은지화를 궁핍한 환경 속에서 건진 우연한 창작물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다. 이중섭은 재료에 유난히 집착한 작가였다. 부단한 재료 실험이 있었기에 독창적인 표현이 나왔다. 뾰족한 도구로 긁어 홈을 내고 물감 채운 뒤 닦아내는 은지화 기법은 도자기 표면을 긁어내고 백토 넣어 구워내는 고려청자의 상감기법과도 닮았다. 전통에 탐닉했던 화공(畵工)의 피엔 우리 도공(陶工)의 예술혼이 유유히 흘렀다.

 은지화는 이중섭에겐 씻지 못할 상처를 남기기도 했다. 1955년 서울 미도파화랑 개인전 때 은지화가 음탕한 춘화로 몰려 철거되는 사건이 있었다고 한다. 이중섭에게 양담뱃갑을 주곤 했던 동료화가 한묵(102)이 "은종이 그림 철거 사건이 있은 후 '둥섭이'(중섭이)가 정말로 제정신을 가누지 못하고 완전히 케이오 돼버렸다"고 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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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실험 정신, 전통. 이 삼박자가 자아낸 은지화는 전에 없던 예술이었기에 이방인 예술 애호가의 눈을 사로잡았다. 주한 미국 대사관 재무관, 대구미국공보원장 등을 지냈던 아서 맥타가트는 1955년 미도파화랑 이중섭 개인전에서 "박층(箔層·얇은 금속 층) 위에 소화(搔畵·긁어 그린 그림)"라며 '신문을 보는 사람들' 등 은지화 석 점을 샀고, 이듬해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에는 금의환향한 이 은지화 3점을 비롯해 은지화 대표작 30여점이 전시됐다.

김미리 기자                                                                    2016.06.10.